“자, 여기 관 위에 동그라미 열 개가 있지? 이 위에 이 쿠키를 하나씩 놓고 이렇게 포장하는 거야, 이 판 위에 몇 개가 있다고?”
“열 개.”
수백 번의 반복 교육 끝에 이젠 제법 전문가티가 나는 ‘래그랜느(LES GRAINES)’ 직원들은 자폐성 장애인이다. 작년 인기리에 방영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자폐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며 대중의 극찬을 받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래그랜느 남기철 대표는 일침을 가했다.
남 대표는 중기이코노미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해서 특수한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자폐성 장애인의 전체를 대표하진 않는다”며, “자폐성 장애인은 다른 장애인보다 작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취업 자체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내 아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길”…아버지 마음 담아 설립
래그랜느는 2010년 5월 남기철 대표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인 ㈜시트라 인터내쇼날(SITRAA INTERNATIONAL)에서 99.9%를 투자해 자본금 3억5000만원의 주식회사로 시작했다. 계기는 남 대표의 아들이다.
남 대표는 “올해 41살(1982년생) 된 둘째 아들이 자폐성 장애인”이라며, “아무래도 업무적인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받아주는 곳도 없을뿐더러, 장애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일자리 자체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일터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품 생산부터가 고된 훈련의 시작이었다. 쿠키류와 빵류를 주로 생산하는 래그랜느의 작업장에는 매일 자원봉사자들이 출근해 직원교육을 함께했다고 한다. 자폐성 장애인은 대체로 말이 자유롭게 되지 않아 대화가 힘든 경우가 많다. 중증인 경우에는 자해성 행동이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작업속도도 더디고 버거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포장지 10개를 놔야 한다면, 숫자 10개라는 개념이 없다 보니 종이에 동그라미 10개를 그려, 올려놓고 다시 빼는 방법을 반복해 포장 작업교육을 해야 했다. 쿠키 성형작업의 경우에도 수백 번의 연습을 거쳤다. 하지만 이런 노력 끝에 쿠키를 판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 일조차 버거워했던 직원들은 이젠 판 위에 반듯이 쿠키를 올려놓고 0.1g의 오차 없이 쿠키를 성형하는 어엿한 전문가로 변모했다.
판매 역시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애인이 만든 쿠키라는 말에 떨떠름한 반응부터 편견이 가득 담긴 시선과 말투 등 별의별 반응을 겪어야만 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는 길도 험난했다. 2년간의 예비사회적 기업을 지나 정식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고용노동부에 신청했지만, 탈락의 고비를 마셔야 했다. 남 대표가 운영하는 무역회사가 주식의 99%를 가지고 있는 구조라 민주적 의사결정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적자가 나는 장애인 기업에 누가 투자하겠나. 누구든 투자할 의사가 있으면 주식을 전부 양도하겠다”고 따져 묻기까지 했다.
그렇게 1년간 비용을 자체 조달하며 버텼고, 이듬해 2013년에 신청이 받아들여져 고용노동부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았다. 2016년에는 장애인시설 보호작업장으로 승인받았다. 개인 자격으로 시설 승인을 받은 건 래그랜느가 처음이라고 한다. 보통 보호작업장은 종교재단에서 운영하거나 지자체 시설을 위탁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보호작업장이 되면 최저임금 적용 제외가 되고, 사회복지사 등이 함께해 안정적인 근무환경에서 직원들이 일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4명의 자폐성 장애인 직원은 13명으로 늘었고, 복지사 3명, 파티시에 2명이 함께 일하는 곳으로 성장했다.
남 대표는 “뉴스를 보면 동반자살 하는 부모들이 많이 나오지 않나? 아이들이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며, “집에서 나와서 혼자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에게는 자립의 기회를, 부모에게는 휴식의 시간을 줄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래서 남 대표는 1995년 7월부터 자폐성 장애인과 매주 토요일 산행을 하고 있다. 자폐성 장애인의 건강을 돕겠다는 취지도 있지만,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고자 하는 바람이 컸다. 이것이 사단법인 ‘밀알천사’의 시작이다. 2016년부터 래그랜느 보호작업장은 밀알천사 재단에 소속돼 있다.
느리지만 ‘섬세한’ 손길로 입소문…“보호작업장 더 생겨야”
래그랜느의 하루는 똑같은 시곗바늘로 움직인다. 21살부터 42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직원들이 매일 9시면 정시 출근한다. 30분간 준비시간을 거쳐 낮 12시부터 1시30분까지 식사를 한 후, 오후 4시30분이면 모든 작업을 완료한다. 이때부터 내일을 위한 청소를 시작한다. 그리고 5시가 되면 모두 칼퇴근한다. 그러는 사이 래그랜느 쿠키들은 수시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시니 ▲녹차 쿠키 ▲사브레 ▲치즈데세루 ▲트윌류(Tuile, 구움과자의 일종) 등 약 20가지가 넘는 쿠키류와 ▲스콘 ▲소프트콘 ▲카스텔라 ▲호두 파운드 등 빵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생산하는 쿠키만 하루에 평균 약 100만원치로 연간 매출 2억원을 꾸준히 달성하고 있다. 입소문도 자연스럽게 나서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기관, 카페, 교회 등 40~50군데에서 지속해서 주문하고 있다. 한 번에 250상자씩 주문하는 기관도 있다.
남 대표는 “래그랜느처럼 다품종 소량화하는 곳이 많지 않다”며, “10만원 이상만 구입하면 단품으로 어디든 배달해 주고, 이외의 주문 건은 택배로 보내준다”고 소개했다.
쿠키류라는 특성상 장거리 운송이 힘들어 대부분의 거래처가 서울지역에 있지만, 명절처럼 특별한 날에는 선물세트의 경우 배달을 나가기도 한다.
이외에 볼펜, 우산, 골프공, 텀블러 등의 판촉물을 조립·인쇄·포장하는 작업도 진행한다. 기업과 학교, 서울시 성북구의회, 강남구청 의회 등 다양한 기관에서 판촉 사은품으로 주문한다. 남 대표에 따르면, 래그랜느의 제과제빵 생산과 판촉물의 비율은 7:3 정도다.
래그랜느의 직원들은 정성스레 빚은 쿠키를 위문품의 형태로 지역사회에 전달하는 일도 한다. 매년 2회씩 삼성 소아암 병동에 전달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권고 휴원시절에는 대구지역과 서울의료원 코로나 의료진, 강남구 예방접종센터에도 위문품(쿠키)을 전달하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기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경기도 포천의 농장에서 농사 체험도 하고 있다. 또한, 연주가 가능한 자폐성 장애인 친구들과 쿠키를 가지고 치매 노인시설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장애인 인식개선 운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남 대표의 꿈은 래그랜느와 같은 보호작업장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폐성 장애인은 약 3만2000명이며 지속해서 증가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 갈 수 있는 일터는 한계가 있다. 강남구에만 9곳의 보호작업장이 있는데, 특수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수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다.
하지만, 보호작업장을 설립하기에 제도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남 대표는 지적했다. 일례로, 육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작업장임에도 지체·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춰야 한다. 더불어 임산부 편의시설, 노인 편의시설까지 다 마련해야 한다. 제도에 모순이 많다고 생각한 남 대표는 보호작업장 승인을 받기 위해 탄원서, 진정서, 의견서를 여기저기 제출했지만 어쩔 수 없이 현 제도에 맞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 대표는 “규제가 철폐되고, 완화돼야 다른 사람들도 보호작업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작업을 하면서 자폐성 장애인들의 사회성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자립해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고 강조했다.
보호작업장 이름에도 이런 남 대표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프랑스어로 ‘씨앗들’이라는 뜻을 가진 ‘래그랜느’는 씨앗이 자라 큰 열매를 이루듯, 래그랜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보호작업장이 널리 퍼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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