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네요”,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느끼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시각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다. 예술 활동 중에서도 회화나 디자인 분야는 ‘시각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 역시 편협한 사고로부터 온 착각이라는 것을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시각장애인 예술가의 작품을 보면서 알아간다. 이것만으로도 에이블라인드의 일차적 과제는 다한 셈이다.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에이블라인드(ablind)의 양드림 대표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잡기 위해 많은 것을 시도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막연히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그림은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영화제 아르바이트와 창업 수업으로 시각장애인과 창업을 연계해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에이블라인드는 시각장애 예술가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지원하는 회사”라고 기업의 정체성을 정의했다.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말이 안 되는데 너무 잘하더라”
재작년만 하더라도 양드림 대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자기 가능성을 확인하던 평범한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특별한 점을 꼽자면, 목회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막연히 ‘이런 일을 하고 싶다’라는 소명의식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부터 노숙자, 장애인, 본드 중독자들을 집에 데려오셨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연히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이루려던 꿈을 내가 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이런 생각은 ‘서울 배리어프리영화제(Seoul Barrier Free Film Festival)’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뚜렷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뭘 해도 잘할 거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정작 특출나게 잘하는 한 가지가 없는 거예요. 당시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바코드만 내리 찍고 있다 보니 현타가 오더라고요. 엄마에게 전화해 ‘교대로 재수할까?’라며 펑펑 울기도 했었죠. 그러다 다음날 핸드폰으로 SNS를 보다가 배리어프리 영화제를 보게 됐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일이구나 싶어 당장 인턴을 신청했습니다.”
숭실대 언론홍보학과에 재학 중인 그는 영화제와 관련된 일을 하든, 그렇지 않든 배리어프리영화제의 경험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지원했다고 한다. 1일 인턴 체험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던 일이 3년간의 스태프 생활로 이어졌고, 장애인 픽업부터 체험부스 운영, 영화안내 일을 하면서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눈을 감고 영화를 보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배리어프리영화제 덕분에 시각장애인들에게 공감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시각장애인 유튜버인 ‘우령의 유디오’ 채널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시각장애인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잘 그려서 깜짝 놀랐어요.”
양 대표는 어렴풋이 했던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시각장애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발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특히, ‘아이템이 없어 못 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전담 교수의 멘트 덕분에 확신으로 돌아서게 됐다고 한다.
“4학년 1학기 수강신청 마지막 날이었어요. 한 창업가가 TV에 나와 1년 동안 아이템을 3번 바꿨다고 말하더라고요. 중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창업 수업을 수강 신청했죠. 그런데 첫 수업 때 교수님의 첫 멘트가 ‘아이템은 중요한 게 아니다’고 하는 거예요. ‘창업가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죠. 그 말씀이 원동력이 됐습니다.”
보다, 느끼다…‘손의 감각’으로 탄생한 작품의 재발견
2021년 6월 창업팀을 결성한 양 대표는 브랜드 설정을 ‘시각장애인 예술 크리에이터 에이전시’라고 명명했다. 할 수 있다는 뜻의 ‘able’과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blind’의 두 영단어를 합쳐 ‘세상에 감춰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이 예술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을 기업명에 담았다.
시각장애인의 그림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중 박환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다섯 번이나 입선했고, 한국국제아트페어에 초청되는 등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예술가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전맹이 됐고, 절망 속에서 1~2년을 살다가 가족의 권유로 다시 그림에 도전하게 된 케이스다. 그는 나무껍질이나 청바지 등을 붙여 손의 감각으로 느끼고, 핀을 캔버스에 꽂고, 줄을 만져서 느낄 수 있게끔 표시한다고 한다. 이후 기름을 자기 손에 느껴서 적당한 농도를 맞춘 후 손의 감각으로 채색한다고 한다.
현재 에이블라인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는 20여명이다. 전업 화가도 있고, 헬스키퍼에서 안마사로 일하거나 인식개선 강사와 같은 직업이 있으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도 있다. 에이블라인드는 이들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해 ▲아트페어 전시회 ▲아트콜라보레이션 제품 제작 ▲장애 예술가 소개 및 장애인 인식개선 활동 ▲외주협력 사업’을 진행한다.
작년 4월엔 성수동에서 ‘함께, 봄’이라는 주제로 제1회 에이블라인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4일간 1024명이 방문할 정도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시각장애 국회의원 김예지 의원과 이은결 마술사 등 유명인사의 관심도 이어졌다. 다양한 체험활동도 준비했다. 시각장애인이 작품을 손으로 만져 느껴볼 수 있도록 원화를 3D 프린팅 작품으로 제작했고, 상자 속의 물건을 만져보고 안대를 쓴 채로 그 물건을 그려보는 ‘어둠 속의 드로잉’ 시간도 마련했다. 배리어프리 전시 요소도 곳곳에 담았다. 전시 관람 루트를 따라 튀어나온 줄을 바닥에 설치해 시각장애인이 발로 느끼며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설치했고, 모든 작품에 QR코드를 첨부해 작품해설 자막과 영상을 듣고,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
올해는 오는 2월18일부터 일주일간 모든 장애예술가의 작품으로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갤러리 구루지에서 진행한다. 이번 주제는 ‘검은색 사랑’이다.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어두움’과도 연결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관람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과 상처의 크기는 비례하며, 그 상처는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고 양 대표는 설명했다.
“빛이 물체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커지잖아요? 이 현상을 사랑과 상처라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엮었습니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사랑은 커지지만, 그 사랑이 곧 그림자와 같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상대방과 가까워질수록 사랑도 커지지만, 상처도 더 크게 보이고, 더 커질 수 있죠. 이를 장애와 연결 지어 보면 손상, 상처까지도 포괄합니다. 상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죠. 즉, 모든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회에서는 ‘쉐도우 프로필’을 촬영하는 이벤트도 연다. 쉐도우 프로필이란,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상태에서 프로필을 촬영하는 것으로 ‘상처의 형태를 얼굴에 드리워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틀 얽매이지 않은 굿즈로 MZ세대 유혹…“같이 즐겼으면”
에이블라인드는 시각장애 예술가의 작품을 굿즈로 제작해 판매도 한다. 최근에 리디자인을 단행했는데, 예전에는 예술적인 느낌의 원화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포인트였다면, 지금은 ‘힙’하고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콘셉트로 새로 디자인했다.
예를 들면, 모델링 페이스트를 이용해 꽃이 입체적으로 담긴 원화에 초록색의 이파리와 곰돌이 인형 실사를 따와 콜라주(collage) 기법을 빌려 ‘현란하게’ 갖다 붙였다. 최근, 이런 방식의 디자인이 MZ세대 사이에서 반응이 좋다고 한다. 폰 케이스, 에어팟 케이스 등으로 만들 예정이고, B2B 상품으로 메모지나 볼펜과 같은 문구류도 개발할 계획이라고 양 대표는 밝혔다.
장애 인식개선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인스타그램툰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작년에는 ‘하나의 음’이라는 뜻의 ‘유니즌(unison)’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과 대학생이 함께 아카펠라 뮤직비디오 2편을 제작했다. 대학교 축제에 참여해 ‘점자 폴라로이드’ 촬영 행사도 진행했다.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주고, 원하는 문구를 점자로 찍어보게 하는 체험이다.
외부에서 시각장애인 예술가의 작품을 구매하거나 대여하기도 하고, 협업을 의뢰하기도 한다. 한전KDN은 ‘KDN IT ON(IT 교육장)’ 기부 활동을 통해 목포소재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시각장애인용 전산설비를 기부할 때 시각장애인 화가의 그림을 걸고 싶다고 했고, 방향제 만드는 업체는 시각장애인 예술가의 작품으로 디자인하고 싶다는 요청도 했다.
양 대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즐기고, 같이 재미있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예술’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분야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장애인도 같이 재미있을 수 있네?’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있다.
“처음에는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사업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하는 물음표가 항상 있었어요. 동료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도 심했고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성과지표가 안 나오면 과감하게 관둘 수 있는 것도 용기다’라며 딱 2년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에 오히려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된 거죠. ‘정말 2년만 해야지’가 아니라 ‘2년밖에’ 안 남은 거잖아요. 그러니 하루하루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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