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8세가 되면 아동복지시설을 퇴소해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열여덟 어른’이라 불렸던 자립준비청년이다. 작년부터 아동복지법 개정으로 만 24세까지 보호기간이 연장됐지만, 여전히 자립 이후 이들의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적·정서적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자립준비청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에서 사회로 발을 내딛는 순간, 많은 청년이 겪는 문제다. 본비(BONVIE)는 이런 청년의 고민을 솔직하게 담아낸 디자인으로 MZ세대의 공감을 끌어냈다.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김윤교 대표는 “본비에서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라기보다 그냥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며, “순수한 자신만의 ‘꿈’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립준비청년의 ‘꿈’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자립준비청년의 실업률과 비정규직 비율은 일반 청년보다 2배가량 높다. 김윤교 대표는 “약 80%의 친구들이 자신의 희망 진로와는 무관한 단순 노무 및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특히 예술 분야처럼 오랫동안 교육과 투자가 필요한 분야는 이들이 진출하기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자립준비청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교 시절, 한 보육원에서 미술교육 봉사를 하면서부터다.
“예술 분야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매번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이 친구들이 가진 재능이나 꿈을 충분히 키워갈 수 있는 환경이냐는 의문이 들었죠. 그때 한창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던 시기였거든요. 조사해보니 우리 사회는 이 친구들이 자립하는데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았어요.”
또래 친구들이어서 더 공감이 갔다는 김 대표는 디자인 분야에 흥미가 있는 자립준비청년에게 디자인 교육과 실무 경험을 제공해 그들의 자립을 지원해줘야겠다 결심했고, 사회문제를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해결하는 창업동아리를 통해 ‘본비’를 론칭했다.
처음에는 미대생 멘토와 자립준비청년을 매칭해 기본적인 디자인 교육을 진행했다. 이렇게 첫 제품이 나왔고, 시장의 반응을 검증하기 위해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한 달 동안 진행했던 크라우드 펀딩에서 총 734명이 참여해 약 2000만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평균 제품 가격대가 1만9000원 선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성공적이었죠. 이후 판매 요청도 쏟아졌어요. 734명의 고객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관심을 이어가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본비의 이런 생각에 공감을 표한 유명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의 자발적인 홍보도 큰 도움이 됐다. KBS 가족 예능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나은이 가족, 가수 바다와 윤하 등 유명인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순수하게 본비의 가치를 응원해줬다.
현재 본비의 매출은 운영비를 제외하고 모두 디자이너 2명의 교육비와 자립 지원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 ▲영상교육 ▲일러스트 및 웹디자인 ▲제품 디자인으로 교육 운영진을 구성해 3~6개월간 개인 맞춤형으로 진행했다. 또, 보육원과 협업해 자립준비청년 디자이너들이 직접 디자인 교육을 해주고, 아이들이 디자인 제품을 직접 만들 수 있도록 캠페인도 기획해서 운영하고 있다.
트렌디한 제품에 ‘공감’ 포인트 더해져 소비자와 연결
본비의 제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야기가 담긴 제품’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체는 자립준비청년이지만, 고객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자기 경험을 투영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브랜드와 공감대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에 본비의 제품은 기획 단계부터 섬세하게 이뤄진다. 우선 디자이너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상하면, 브랜드 내부적으로 이 이야기를 고객이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게 될지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자립준비청년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고객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면, 이것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비재를 판매하는 브랜드다 보니 특별히 기능적인 혜택을 제공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브랜드 가치에 더욱 집중했고, 그것이 곧 우리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본비는 자립준비청년을 돕는 브랜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브랜드이고, 본비의 디자이너는 우리의 파트너거든요. 고객 역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제품을 보며 ‘친구’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본비의 제품에는 디자이너가 직접 작성한 제작의도 카드가 동봉된다. 대표적으로 보육원을 퇴소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버킷백 형태 파우치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고객으로부터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보육원에 20여 년이나 살았는데 들고나왔던 가방이 너무 작더라는 거예요. 그 작은 가방을 들고나오는데도 가방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짐이 느껴졌던 거죠. 그래서 사회구성원이 관심을 두고 함께 가방을 들어준다면, 그 무게를 덜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또 다른 제품인 에코백에는 증명사진을 형상화한 그림이 박혀 있다. 이는 에코백이 출시된 시기와 맞물려 있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새 학기만 되면 증명사진을 새로 찍잖아요? 에코백이 출시된 시기가 3~4월로 새 학기 시즌이었거든요. 에코백을 디자인한 친구는 이 시기만 되면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을 안고 증명사진을 찍었던 일이 생각난대요. 그리고, 그 시작의 설렘이 본비를 만나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디자인해가는 이 시간과 너무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신나는 마음을 고객에게도 선물하고 싶어 기획하게 됐습니다.”
특별한 줄로 알았던 자립준비청년의 이야기가 오히려 청년들의 공감을 사면서 이 제품들은 본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자립준비청년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 청년의 마음과 똑 닮아있기 때문이다.
‘의미’만 좋아선 안돼…“제품력 있어야 다시 찾는 브랜드”
본비는 소셜벤처 스타트업이기 전에, 하나의 디자인 브랜드다. 따라서 소비자가 꾸준히 찾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고객의 제품 만족도가 높아야 한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이에 그는 제품을 개발할 때도 퀄리티와 디테일에 세세하게 신경 쓴다고 한다.
“소비자가 계속 찾아야 우리의 가치도 지속해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사회적 가치와 제품의 디자인 퀄리티를 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브랜드 전반의 경험 자체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디테일 하나하나 집요하게 신경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코백의 경우 어깨끈을 몇 cm로 만들어야 사람들의 어깨가 아프지 않은 줄 알기 위해 우리나라 여성 평균 키를 가진 팀원이 직접 테스트한다. 가방 안에 얼마나 물건을 넣을 수 있는지도 체크하고, 몇 kg까지 견딜 수 있는지도 실험한다.
그 결과 본비를 구매한 소비자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에코백인데 질이 너무 좋고, 바느질과 원단이 훌륭하다’, ‘수납 포켓도 튼튼하다’, ‘끈이 안정감 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만든 게 느껴진다’ 등의 리뷰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본비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총 34종류다. 패브릭 가방류와 핸드폰 케이스, 에어팟 케이스, 키링과 같은 디지털 액세서리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본비의 제품은 스마트스토어와 크라우드 펀딩, 서울 외대 앞과 마포의 독립서점 2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은 세 번째 크라우드 펀딩을 앞두고 있다.
본비는 고객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SNS, 뉴스레터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대중과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고 있고, ‘본비 프렌드’라는 브랜드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주기적으로 고객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피드백도 받는다.
사회적 가치를 보유한 다양한 소셜벤처 브랜드를 모아 ‘구디스트(Goodiest)’라는 팝업스토어도 기획,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성수동에서 열었던 팝업스토어에는 이틀간 300여명이 방문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오는 5월에는 2회차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2회때는 오프라인 팝업스토어 전후로 온라인에서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다.
“소비자가 착한 소비를 하고 싶어도 브랜드에 닿는 경로가 너무 힘들어요. 팝업스토어를 기획한 이유가 바로 이런 허들 자체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고 찾아보자’라는 의미를 지닌 본비(本備)는 ‘자립준비청년의 짐을 함께 들어주세요’가 첫 시작이었다면, 지금은 ‘이제 나도 짐을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같이 들어줄게요’라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김 대표는 본비가 늘 친구 같은 브랜드로 고객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브랜드 내부적으로 인식 개선이라는 강한 미션이 있었지만, 누구의 생각을 강제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브랜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문제를 조명하는 방식에 대해 브랜드의 정체성이 확실히 잡혀 있고,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꾸준히 노력한다면 실제로 경험한 이후의 과정은 고객의 몫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본비만의 이야기를 제품에 정성껏 담을 겁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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