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내가 선생님이라면 이거 안 해요. 의사가 뭐가 답답하고 아쉬워서, 이 험난한 길을 가려고 하세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언어병리학 관련 석박사 시절, 아이들세상의원 이현숙 원장이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2010년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조차 많은 언어치료사로부터 ‘왜 이걸 하지?’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평생의 염원이었던 공부를 하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있던 이현숙 원장조차 아침에 일어나면 ‘어떡해서든 해야지’ 굳게 마음 먹다가도, ‘이게 진짜 내 길일까?’ 의기소침해져 잠들기를 몇 년간 반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아이들세상의원(THE CLINIC, CHILDREN'S WORLD) 진료실에서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이현숙 원장은 “나에게 있어 발달센터는 가슴 한쪽에 미뤄둔 숙제 같은 존재였다. 죽기 전에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것 같았다”며, “의사로서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발달지연이 있는 아이들에게 의료상의 평가와 총괄적인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개원하게 됐다”고 밝혔다.
꿈꿔오던 ‘특수교육’ 열망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더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소아청소년과를 전공한 이 원장은 원래 의대보다는 독문과 진학을 꿈꿨다고 한다. 특수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독일이 특수교육이 잘 돼 있으니 독문과에 진학해 독일로 유학 가야지’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의 진로가 바뀌게 된 계기는 독문학 박사 학위를 따고 한국에서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던 옆집 언니 때문이었다.
이현숙 원장은 “옆집에 살던 언니가 이대 독문과를 나와 독일로 유학을 떠나 15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온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로망과 같던 그 언니가 ‘나를 봐라. 그래봤자 지방으로 보따리 장사나 다니는 처지다’라면서 푸념 섞인 조언을 한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도 아닌데 이 진로가 맞는 걸까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이때 이 원장의 아버지가 ‘여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의대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해 1974년 ‘운명’처럼 의대생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의대에 진학한 이후에도 ‘독일’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특수교육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강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남산에 위치한 ‘괴테하우스’다. 독일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독일어 테스트에 합격해야 하는데, 괴테하우스에서 독일어 초급부터 중급, 고급까지 모두 이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그 꿈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이 원장은 “당시만 하더라도 30살 이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나 역시 레지던트 2년 차에 결혼했고, 남편이 군대를 갔다. 즉, 상황이 현실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라며, “자연스레 특수교육에 대한 열망은 접어둘 수밖에 없었고, 소아청소년과 개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1984년 이현숙 원장은 소아청소년과를 오픈했지만, 특수교육에 대한 열망의 끈을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원장은 “속된말로 소아청소년과가 돈을 너무 잘 벌 때였다. 책상, 아기 몸무게 재는 체중계, 청진기만 있으면 하루에 100~200명은 기본으로 볼 때였다”며, “그러다 보니 발달센터 개념은 정신과의 영역이었지, 소아청소년과에서는 발달까지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그럴 계기도 없던 시기였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의사가 되고 보니 언어 발달이 늦은 아이들을 많이 보곤 했다. 그러면서 의사로서 내가 뭘 하면 좋을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며, 자신이 꿈꿔오던 열망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더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그렇게 2004년 한림대학교 언어병리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정상청력을 지닌 미숙아와 만삭아 울음의 음향 및 생리학적 특성’이라는 논문으로 언어청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숙아와 만삭아의 울음소리를 녹음해 음향분석을 했을 때, 칭얼거림이나 우는 소리에서 차이가 난다는 게 논문의 내용이다.
두 돌 전 치료 중요…부모교육부터 학교준비반까지 체계화
2009년 본격적으로 발달센터 개념의 아이들세상의원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현숙 원장은 두 돌 때 뇌세포 성장이 급속도로 급등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전에 치료를 하는 게 좋은 예후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5개월~1세 정도만 돼도 아이들의 반응이 없으면 병원에 와서 스크리닝(screening)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발달지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민감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지만, 이 이면에는 스마트폰 과다 노출로 어린 나이부터 발달기회를 놓치는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는 방법을 숙지하지 못한 부모가 육아 스트레스로 지친 나머지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심하면 아이가 하루에 5~10시간까지 스마트폰에 노출된 경우도 있다.
아이들세상의원은 이런 부모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달에 걸쳐 8번 진행하는데, 아이랑 어떻게 놀아주고, 어떻게 눈을 맞추고 얘기하며, 상호작용을 해줘야 하는지 등을 알려준다.
조기 교실도 운영한다. ABA(Applied Behavior Analysis, 응용행동분석) 행동발달 전문가가 아이를 일대일로 전담 마크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팀장 교사가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현숙 원장은 이 시기 집중적인 치료를 할 것을 권했다. 6개월~1년을 목표로 교육을 완료한 후, 통합 어린이집을 가고, 이후에 일반 어린이집에 가는 등 순차적으로 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이들의 발달은 누구도 함부로 예단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세 돌 때 인지영역에서 염려가 된다고 나와도 5~6세가 돼야 확진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자폐 스펙트럼 의심 진단을 받은 아이라 할지라도 교육을 해보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아이들세상의원은 언어평가, 발달평가 등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한 두 달 동안 각각의 전문가가 모여 회의를 계속하면서 점검의 시간을 갖는다. 이 원장은 이후 치료가 시작된 아이는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짠 프로그램이 ‘학교 준비반’이다. 7~8명의 아이를 칠판, 책상, 책가방 거는 고리까지 학교 교실과 똑같이 꾸며 놓은 곳에서 교육하며, 알림장도 써보고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 줄 서서 가는 연습도 한다. 실제로 이 수업을 통해 아이가 치료 효과를 봤다는 후기가 많다고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기회와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현숙 원장은 2010년부터 소아청소년과 연수강좌를 다니면서 이전의 인식을 바꾸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이전에는 영유아 검진 시 말이 느린 아이 보호자에게 ‘세 돌까지 기다려 보세요’라는 말을 전하는 게 지배적이었지만, 이 원장이 언어발달, 말더듬이, 말이 느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강의를 통해 알리기 시작하면서, 좀 더 빠른 판단을 내리고 발달센터로 연계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과에서 발달센터로 방향을 틀기까지 주변의 눈총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아동 발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낮은 때여서 첫 3년간은 고전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더 컸다고 이현숙 원장은 자부했다. 그러며 좀 더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차별화를 키우고 싶다는 꿈도 내비쳤다.
그는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 특화 프로그램을 개발해 좀 더 세부적이고, 체계화된 곳으로 나아갈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치료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다행히도 우리 병원에는 기본적으로 8~9년 이상 오래 근무한 치료사들이 많다. 아이들에 대한 마인드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라며, 60여명의 치료사들과 합을 맞춰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현숙 원장은 부모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 원장은 “아이가 말이 느리다면, 단순히 느린 건지, 발달지연으로 인한 건지 부모가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두 돌이 되도록 엄마, 아빠가 안 되고, 모방이 안 된다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라도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아이들은 어떻게 놀아주고, 말을 걸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아이가 말하기도 전에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구나’라며, 아무 말 없이 가져다주는 것은 좋지 않다. 아이에게 경험을 부여하고,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스스로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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