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전기를 에너지 혹은 아껴 써야 할 자원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이 숨어 있습니다. 인체를 예로 들면 혈관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서울대 공과대학 내 회의실에서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파일러니어(PYLONEER) 배승환 대표는 ‘건강을 측정하기 위해 혈류를 측정하듯이 전력을 측정하는 것은 도시의 건강을 측정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즉, 에너지를 소모하는 패턴이나 파형들을 분석하면 그 장비가 어떤 장비인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세부적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배승환 대표는 “전기화 시대에 전력공급 방식과 전력수요는 더 급증할 것이다. 이에 전기를 더 효율적이고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전력관리 기술이 필요하다”며, “우리는 데이터 기반의 전력관리 솔루션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AIoT ‘스마트미터’로 전기차 충전소 관리를 섬세하게
2022년 10월 서울대 기계공학부 연구실 동료였던 배승환 CEO, 임혁순 COO, 정구엽 CTO 3인이 함께 뜻을 모아 결성한 파일러니어는 탄자니아에서 열린 ‘스마트 적정기술 경진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모두 전기·전력 분야에 뜻이 있다는 공통점이 세 명을 똘똘 뭉치게 했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과연 우리가 전기를 적정하게 잘 분배해 사용하고 있는가?’였다. 당장 이들이 사용하던 실험실부터 알아봤는데, 결론적으로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사용한 전기량만큼 요금을 계산하지 않고, 모니터와 컴퓨터 대수를 따져 1/n로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의 계량기가 몇 대밖에 없어 세부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배승환 대표는 “탄소중립시대에 에너지 절약의 시작은 ‘누가, 얼마큼 전기를 썼는지’ 아는 것부터가 시작점”이라며, “그래야 쓸모없는 전기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파일러니어가 주목한 분야는 전기차 충전소다. 전기차 사용자가 원할 때 전력을 분배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충전 중인 전기차가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다음 차는 충전을 못 한다거나, 완충이 됐는데도 주차를 계속하고 있어 해당 전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등이 그렇다.
이에 파일러니어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전기를 한쪽에 고이게 놔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멀티탭’을 떠올리면 된다. 가정에서 멀티탭에 여러 전기를 꽂아 사용하는 것처럼 전기차 충전도 그렇게 하자는 게 기본 취지다. 단, 전기에는 적정량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점을 모니터링해줘 다른 곳에 적절히 보내주는 것이 파일러니어의 핵심기술이다.
배 대표는 “하나의 전력선을 다수가 공유하기 때문에 별도의 전기차 충전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며, “공간 낭비는 줄이고, 충전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EV Ready Zone(전기차 충전 가능구역)으로의 변환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 기술의 기반에는 ‘스마트미터’가 있다. 스마트폰 두 개 정도 크기의 이 기기는 인체의 ‘뇌’라고 볼 수 있는데, 전기신호를 보내기 위한 명령을 내리고, 전력 데이터를 수집해 전력품질, 전력 패턴 등 세부 특징을 분석해 도출한다. 또한, 과전류 및 저전압을 탐지하고 스마트미터와 연결된 충전장비의 상태 및 이상을 예측, 분류해 관리자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이는 신고 베이스로 고장 유무를 파악하던 것과 달리 선제적으로 고장을 감지하기 때문에 충전기 특이 파형 감지, 충전소 전력 피크 탐지, 열폭주 화재 사전감지는 물론 출동인력 필요 유무까지 판단해 알려준다.
무엇보다 경제성 확보 측면에서 유리하다. 기존의 충전기는 계측장비부터 통신장비까지 모두 통으로 설치해야 했지만, 파일러니어의 시스템은 분전반마다 스마트미터를 설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균값을 계산하는 기존 계량기와 달리 밀리세컨드(millisecond) 단위의 데이터를 분석해 클라우드에 저장할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저장을 해주고, 계속해서 인공지능 학습으로 데이터를 분석해 나가기 때문에 도출된 결괏값만 보면 된다.
현재 스마트미터는 국내 주요 전기차 충전소 회사들과 협약을 맺고, 서울시를 중심으로 실시간 모니터링하면서 학습하고 있는 단계다. 또한,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와 전력 공유 충전 발생 트랜잭션(Transaction) 확인 및 효용 검증을 위해 2024년 5월부터 2025년 4월까지 다채널 충전소를 운영하며 실증사업 중이다. 배 대표는 이 시스템이 상용화될 경우 충전소 운영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봤다.
각 산업 분야에 적용…통신·보험 등 연계 서비스 확장도
파일러니어의 스마트 모니터링 솔루션은 전기차 충전소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가로등 업체와 스마트 가로등형 충전기 실증사업을 통해 자동차, 오토바이 등 이동수단 충전기로 활용하고 있고, 공장에도 적용해 값비싼 장비들이 고장났는지, 고장이 날 것 같은지 미리 파악을 해주면서 공정별 전력사용도 모니터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전력 사용이 높은 공정은 새벽시간으로 옮겨 전기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
아크 차단기 업체의 요청에 따라 아크 진단 및 차단제어 개발도 하고 있다. 기존의 아크 차단기는 한계치를 설정해 그 범위를 넘으면 아크로 인지하기 때문에 ‘양치기 소년’과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다 보니 차단기를 빼버리거나 강도를 조절해 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정작 큰 사건이 일어날 경우 대처를 제때 못할 때가 있다고 한다. 이에 파일러니어가 한전KDN의 지원을 받아 아크 차단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밖에 충전소나 건물 등에서 취득한 전력 데이터를 보험사, 통신사, 차량 배터리 제조사 등 여러 산업군에도 활용할 수 있다. 가령, 보험사의 경우 전기차 충전소 보험이 의무화되는 시기가 오면, 파일러니어가 보험료를 측정할 데이터를 제공해 주는 식이다.
파일러니어의 이런 기술력은 이미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2024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기후기술 경진대회에서 글로벌 부문 톱20 기업으로 선정됐는데, 아시아에서는 일본 기업과 함께 뽑혔다. 같은 해 11월에는 아산나눔재단에서 진행한 기후기술 혁신대전 및 아산 유니버시티(Asan UniverCT)에서 대상의 영예도 안았다. 2023년에는 뉴욕주 에너지연구개발청(NYSERDA) 초청기업으로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배승환 대표는 “뉴욕의 경우 100년 이상 된 전력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력망을 다시 깔 수는 없는 상황이라 전력을 어떻게 하면 아낄 수 있고, 안전하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뉴욕주 에너지연구개발청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 내부적으로 역량을 더 쌓은 뒤 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배 대표는 파일러니어가 전력 데이터를 수집하고, 거기에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데이터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요즘 같은 에너지 대전환 시기에 과거 중앙화된 전력 시스템만으로는 관리할 수 없기에 건물 말단에서부터 어떻게 관리할지가 중요한 이슈라고 본다. 현재 우리가 모니터링하고 있는 전력망 말단의 데이터들을 취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메인스트림에 있는 송전, 배전에 대한 수요 예측이나 부분 예측이 가능해질 것”이라며, “그 데이터가 기후위기로 인한 태풍이나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수요를 조절하고, 제어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어 “전력을 에너지의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인사이트를 알려주는 도구의 하나로 인식을 바꾸는 데도 일조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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