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업고 놀자~!’ 판소리 ‘춘향가’ 중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을 나타낸 이 노래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노래를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전공자라 하더라도 장단 하나하나, 음계 하나하나 정확히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유는 국악은 정립된 이론과 규칙이 없고, 무조건 도제식 교육을 통해 연주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학생은 정확히 어떤 음인지도 모른 채 선생님이 ‘이 음이다!’라고 하면 거기에 무조건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이는 데이터로 이뤄지는 AI 세상에서 한계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율랩(YULLAB Inc.) 이나영 대표는 중기이코노미와의 인터뷰에서 “국악의 매력과 개성은 떨고, 흘러내리고, 밀어 올리는 등 음을 꾸미는 다양한 표현법인 시김새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시김새에 대한 기록은 없다. 1987년도에 서한범 단국대 교수님이 몇 가지 기법을 정리한 게 전부”라며, “제대로 정립된 이론이 없으니 요즘 같은 데이터 시대에 국악을 활용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이 다양한 산업에 국악을 활용할 수 있도록 우리는 국악을 분석해 데이터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음은 뭘까?’…무질서함 속에 배열된 음계를 데이터로 정리
4살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던 이 대표는 청소년기에 가야금으로 전공을 바꿔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국악을 공부했다. 하지만, 여느 전공자들과 달리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모두 다 접하다 보니 국악을 공부하면서 의문점도 늘어갔다고 한다.
이나영 대표는 “피아노를 오래 쳤었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은 계이름이나 음 톤에 대한 답답함이 더 크게 느껴졌고, 도제식 교육에 대한 갑갑함도 있었다. 일례로, 어제와 오늘의 소리가 분명히 달라졌는데 선생님이 맞추라고 하면 무조건 맞춰야 했다”고 떠올렸다. 또한, “선생님이 원하는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해서는 악보를 보는 게 아니라 악기의 안족 위치를 바꾸는 식으로 연주하고, 그걸 기억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타 전공자와의 협업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 대표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국악을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의 버클리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화음악을 공부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방송국 음악감독과 음반 제작회사의 CEO로 일하며, 200곡이 넘는 음악의 저작권을 보유할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이어졌다고 한다. 실력 있는 뮤지션들과 좋은 음악을 만들고, 제작비를 투여하더라도 음원 시장은 대기업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돌아가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국악에 대한 답답함과 음원 시장에 대한 한계를 느끼던 차, 우연히 카이스트(KAIST) 문화기술대학원 학생과의 만남을 통해 국악 데이터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나영 대표는 “당시 카이스트에서 국악의 AI화를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데이터가 없다 보니 3년간 분석을 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때 내가 합류하게 되면서 분석과 증명까지 마쳤다”고 했다.
국악 분석의 핵심은 시김새였다. 이나영 대표는 국악의 시김새를 김치에 빗대어 설명했다.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추, 파 등의 기본 재료가 필요하지만, 김치의 진짜 맛은 고춧가루, 마늘, 액젓의 배합으로부터 나온다. 즉, ‘마늘과 액젓을 어느 정도 배합할 때 이런 맛이 난다’는 레시피인 셈이다. 이는 ‘한국의 김치는 일본, 중국의 것과 이런 점에서 다르다’라는 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그는 “자유롭고, 무질서하고, 느낌에 따라 흐느끼는 국악은 악보에 제대로 된 표시조차 돼 있지 않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들었고, 데이터화 역시 불가능했다. 하지만, 국악은 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시김새로 이뤄져 있으며, 이 시김새는 규칙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를 중심으로 분석해 분석장치 프로그램까지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에 따르면, 당시 해금산조를 분석했는데, 5분 정도의 음을 8000조각으로 나눠 분류했고, 이렇게 잘게 자른 데이터들을 하나하나 끼워 맞췄다고 한다. 이후 식별이 가능한지 프로그램을 돌렸더니 92%의 식별률이 나왔다. 즉, 데이터로서 가치를 증명한 셈이다.
AI의 등장으로 음악계 큰 ‘변화’…국악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희망을 본 이나영 대표는 기존의 음원 플랫폼에 기대지 않는 플랫폼, 누구나 국악을 콘텐츠에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2021년 2월 율랩을 설립했다.
율랩의 첫 시도는 ‘YULBGM’ 플랫폼 개발이었다. ‘저작권이 없는 시장’을 모토로 국악과 현대음악의 융합을 통해 다양한 국악의 모습을 대중에 선보이겠다는 목표 아래 개발한 플랫폼이었다.
YULBGM에는 누구나 콘텐츠에 쓸 수 있도록 2분 내외의 국악 BGM 1500곡이 들어 있는데, 민속음악, 일렉트로닉, 댄스 등 장르를 세분화했고 일상, 판타지, 동기부여 등 50가지 감정에 맞춘 음악을 필터를 통해 자유자재로 골라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율랩은 또다시 변신을 꾀해야 했다. AI의 등장으로 인해 음악 시장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나영 대표는 “음악 생성 AI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가령 ‘중기이코노미 기자와 만나서 인터뷰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 줘’라고 텍스트로 명령만 내리면 여기에 어울리는 노래 5곡을 30초도 되지 않아 사운드, 가사까지 완벽하게 뚝딱 만들어 낸다”며, “이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하나하나 테이크를 올려서 음악을 만들고, 믹싱하고, 마스터링하며 만들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데이터화한 국악을 입히면 누구나 쉽게 국악을 접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봤다.
그는 “분석한 데이터를 통하면 음계가 정확히 나온다. 즉, 디지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이고, 어떤 산업이든지 국악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연주한 음원을 CD 등의 장치를 통해 듣는 것 이외에 디지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국악 시장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했다.
데이터를 활용하면 ‘국악의 세계화’도 가능해진다
2024년도에 이나영 대표는 ‘국악의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2024 NYC 스타트업 서밋에 참가해 발표도 하는 등 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데이터로 할 수 있는 시장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율랩은 ‘판소리 배우기 앱’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국악도 데이터가 가능하고, 이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장에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나영 대표는 이 앱을 통해 ‘전통의 울림을 누구나 쉽게, 어디서나 배울 수 있게 하겠다’고 피력했다.
앱의 운용방법은 간단하다. 시김새 기반의 음성분석을 기반으로, 발음, 음정, 장단 분석을 통해 사용자에게 실시간 피드백을 해준다. 일례로, 판소리의 한 부분을 따라 불렀을 때, 똑같으면 패스, 틀리면 틀린 부분이 표시되는 식이다.
이는 국악을 재미있게 배우고 싶은 사람과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외국인을 비롯해 복지센터, 문화센터 혹은 노인 치료를 목적으로 한 재활원의 치료 콘텐츠 등 다각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또, B2B, B2G와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진출도 꾀할 수 있다.
이나영 대표의 최종 미션은 국악 데이터를 이용한 가상악기를 개발하는 것이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 때, 유일하게 국악만이 신시사이저로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악기 파트를 보더라도 일본, 중국 악기만 들어 있을 뿐 한국 악기는 없다.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 대표는 “세상의 모든 데이터는 다 공개돼 있는데, 국악만 그렇지 않다. 시장에서 홀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 초까지 데이터를 구축해 판소리 배우기 앱을 완료할 것”이라며, “이를 기반으로 가상악기, 디지털 악기, 교육, 엔터테인먼트, 학문적으로도 쓸 수 있도록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전통의 음계를 데이터로 이어 나가겠다는 뜻에서 회사 이름도 한국음악 계이름인 ‘율’에 랩을 붙여 이름 지었다”며, “국악에 기술을 융합해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국악을 현대사회로 끌어오고, 더 나아가 글로벌로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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